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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교양) 모두의교양 / 중세의 사회와 생활

by 거제매생이 2020.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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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사회와 생활 형식

중세사회는 피라미드 꼴의 위계질서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최정상에는 귀족들이 있었으며, 이들 내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했다. 즉 최정상에 군림하는 황제의 밑으로 왕, 공작, 변경백작, 백작 그리고 기사들이 피라미드 꼴을 이루었다. 그 다음에는 도시의 자유시민들이 있었는데 이들 내에도 고유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즉 시의원 자격이 있는 도시 귀족,부유한 상인, 수공업자, 장인(匠人), 직공 및 수련 공들이 그 질서의 각 층을 이루고 있었다. 수공업자들은 해당 조합들 내에 조직되어 있었다. 농촌 지역에는 농민, 소농민, 하인 그리고 농노가 있었다.

교회는 교황으로부터 시작해서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 수석신부, 수도 사, 신부, 수도승 그리고 평수사까지 연속적인 위계질서를 형성했다. | 이 사회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속한 계층에 평생 동안 머물렀다. 그의 신분이 그의 삶을 포괄적으로, 즉 법적으로, 정치적으,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결정했다. 개인은 모든 사회관계에서 그가 속한 단 하나의 계층, 이를테면 상인, 농부, 수공업자 또 는 기사였다. 혼합된 신분은 괴물이었다. 개인의 신분과 사회적 역할 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창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예술에 서는 개인적인 것보다 전형적인 것이 강조되었다. | 사회 위계질서의 불평등은 종교를 통해 보상되었으며 현세의 불이익은 내세의 이익으로 균형이 맞추어졌다. 그렇지만 내세의 질서도 위계질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혀 새로운 질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 서 내세에도 맨 위에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마리아, 사도들 그리고 천사장들과 함께 있었다. 그 다음에는 하늘의 군대, 예언자들, 성서의 영웅들, 그 아래에는 순교자, 성인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대열은 현세 에서의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과 모든 교회 조직의 직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가장 밑바닥에는, 즉 대칭적 대응 부분에는 사탄이 악마들, 귀신들 그리고 졸병 악마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졸병악마들은 저주받은 자의 영혼을 지옥에서 고문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되었다.

중세 때 하늘과 지옥 사이에는 연옥이란 것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죄를 지었거나 일생 동안 착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뜨거운 기름솥에서 바싹바싹 튀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랫동안 죄를 뉘우쳐야 했는데, 이때 친구와 가족들의 추도미사와 면죄부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돈을 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가족은 죽은 사람들과 계속해서 접촉할 수 있었다.

 

공동체를 위해 은행 역할을 하는 교회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를 치료제와 은총의 수단들을 관리하는 은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막대한 치료비를 은행에 예납했고 사 제들은 이것을 투자와 치료비 대부를 위해 이용했다. 사람들은 보수를 지불하거나 부과된 세금을 납부한 다음에(헌납, 순례여행, 기부금), 또는 고해성사, 간구의 기도 또는 공개적인 고행 따위의 상징적 자본금을 지불한 다음에 교회로부터 치료 대부를 받았다. 이 대부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었다. 아니면 특히 경건한 생활로의 변화를 통해 스스로 그 은행에 헌신 함으로써 교회의 치료 재산의 여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서 교회는 독점적이었으며 사제들은 이 치료 재산에 대한 접근권이 있는 유 일한 자로서 시험을 보고 맹세를 해야 했다. 치료재산의 분배를 위해서는 확정된 요금 조견표(早見)가 있었다. 이에 따라서 추도미사는2 굴덴(옛날 금과 은 화폐의 명칭. 현재는 네덜란드 화폐 단위 - 옮긴이), 속죄의 기도는1 굴 덴, 면죄는5 굴덴,총사면은 농가의 총 재산 중에서 절반을 바쳐야 했다.

대부 기관으로서의 교회들의 재정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치유재 산이 많은 은행은 순례자의 뼈 한 조각을 확보한 교회였다. 그런 유물은 좋은 선전 재료였는데, 이는 은행의 확보 재산을 매우 튼실하게 했으며 여 느 은총 수단들 이외에도 신유 따위의 합법적인 기적을 판매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은행 지점들은 자신의 입지 장소를 유명한 순례성지로 만 들었고 지역주민 전체에게 기쁨과 이익을 전파해주었다.

유명한 순례 지역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나 성 야고보의 뼈가 있는 산티아고나 성(聖) 삼왕(아기聖)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 세 사람을 일컬음 옮긴이)의 유골이 있는 쾰른이었으며, 또한 캔터베리 대성당의 토머스 베켓 주교의 유골함도 순례 행렬을 불러일으켰다. 이 행렬은 작가 초서Chaucer의 유명한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에 묘사되어 있다. 이 순례 행렬로 먹고사는 관련 산업 분야가 매우 많았다.

 

십자군운동 

십자군들의 행렬은 좀 색다른 종류의 여행 행렬이었다. 과거에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던 성지의 순례 장소들을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무슬림의 지배자들이 1096년에 갑자기 폐쇄하면서부터 그 행렬이 시작되었다. 로트링겐 출신의 보에몽 Bohemond의 지도하에 군대가 조직되어, 이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200년 동안에 십자군이 여섯 차례 더 조직되어 원정을 떠났고, 또 한 차례는 순수하게 소년들로만 조직된 적도 있었다. 이때 특수한 전투기 사단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신전(神殿) 기사단, 요한 기사단 그리고 독일 기사단이었다. 이 십자군들 중의 하나는 실수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 리고 아주 드물게 현지의 무슬림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 철학·건축· 농업 그리고 인접 분야들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는데, 이런 사실은 훗날 레 싱 Lessing이 성전 기사 Templer가 등장하는 희곡 「현자 나탄 Nathan 창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뒤 독일 기사단이 실직했을 때 프리드리히 황제는 동프러시아와 러시 아의 발트해 연안 지역을 그 기사단에게 내어주면서 포교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기사단은 이 기회에 거기에서 자신의 국가, 이른바 기사단 국가를 한 토막 베어내 가졌다. 그들은 그다지 얌전하지 않았으므로 폴란드의 역 사 발전에, 다른 십자군들이 아랍인들에게 했듯이 뭔가 음흉한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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