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수도원은 종교적 공동체 생활이 고도로 발달한 형태였다. 그곳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한 일종의 훈련소였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기록경기의 선수들처럼 엄격하고 고된 훈련과 금욕생활을 해야 했다. 철칙처럼 지켜야 하 는 일과표, 정확히 단계화된 다이어트 식사, 규칙적인 기도와 예배시간, 그 나머지 시간은 노동을 통한 정신훈련인 농사일로 조직된 생활이었으며 '기도하고 일하라가 슬로건이었다. 요컨대 엄격한 규율에 따른 삶이었다. | 이 규율의 종류에 따라 수도원은 엄격하거나 온건한, 또는 개화되거나 금욕적인 수도원으로 구별되었다. 최초의 수도원은 베네딕투스 수도회로, 529년에 베네딕투스Benedictus가 몬테카시노에 세웠다. 이 수도원 소속의 영향력 있는 수도원 하나가 프랑스의 클뤼니에 있었다. 끊임없는 개혁의 지에 따라서 수많은 수도원들, 즉 카타리나, 시토, 아우구스티누스, 카르멜, 프레몽트레 수도원 그리고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의 탁발 수도회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중에서 탁발승 수도회들은 나중에 이단 및 마녀 사냥 전 문가가 되었으며, 이따금씩 인종차별적 대학살을 선동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때 수도승이었던 루터 Luther도 동족들을 향해 '제국 크리스털의 밤’(1938년 11월 9~10일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전국적 테러가 이루어진 밤을 뜻 하며, 부서진 유리창 조각에서 유래. 필자는 이것을 일반적인 인종학살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옮긴이)에 동참하자고 선동했다.
그러나 원래 중세 초기(550~850)의 수도원은 개화된 해방구였다. 수도원 에서는 종교적 영향력, 교육 그리고 기독교만 생산된 것이 아니라 숲의 개 간, 잘 양조된 맥주 따위의 좋은 발명품들, 또는 기적 같은 생약 치료제도 생산되었다. 고대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필사본들도 거기에서 구조되어 사본이 만들어지고 보관되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원은 영국을 기독교화시켰고 이 두 나라의 수도원은 독일을 기독교화시켰다.
그밖에도 수도원에서는 현대 산업사회의 규칙적인 일과를 일찍이 실험 한 셈이었다. 시간 기록계에 따른 노동 시간표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인은 모두 수도사와 같다. 기록경기에 해당하는 스포츠의 선수들의 훈련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중세의 평범한 사람들은 시계에 따라 일하는 대신 태양에 따라 일했다. 여름에는 길게, 겨울에는 짧게, 그리고 부수적으로 생기는 일감에 따라서, 이를테면 추수 때에는 좀 더 오래 일했고, 만약 할 일이 없으면 쉬는 게 가장 좋았다. 어차피 일년 중 삼분의 일은 교회의 축제일이나 그 밖의 공휴일이었으니까.
기사도
수도원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양조장, 방앗간, 포도주 저장 지하창고, 약초 생약 취급 약국 그리고 병원 따위의 연계 사업 분야를 갖춘 독립된 장원(莊園)이었다. 농촌지역에는 수도원 말고도 마을 주변의 높은 산 위에 성들이 있었다. 성은 지역 귀족의 거처였는데, 이들은 대가족처럼 중대 병력 이상의 사병들을 거느렸으며 세력이 클 때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 중세의 전성기 때에는 고유한 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무술 시합,궁정 축제 그리고 각종 기사대회의 장이 되었다. '성주의 부인'은 기사들의 충성을 한 몸에 받았다. 가신들의 충성은 사랑으로 승화되었고(성주는 이것을 반대할 수 없었다), 성주 부인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노래로 예찬되었다. 궁정에서 귀족문화의 일부가 된 여성 숭배는 여기에서 생겨났다.
기사도 문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부각되었던 것은 결국 중세의 문화인 전투를 시민문화화 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두 가지 방법, 즉 여 성배(여성의 명예를 위한 투쟁)와 윤리를 통해서(약자, 과부 그리고 고아의 보호) 이루어졌다. 이로써 기사는 에로틱한 장면들에서 남성적 매력을 갖춘 낭만적 인물로 발전했다. 자신의 여주인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가난한 자와 약자를 위해 희생하며, 행동과 사고가 대범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항상 투쟁하며, 끝까지 충성하는 매너도 매력이 넘쳐 호감을 산다. 이것은 유럽 문화에서 남성적 매력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채색했다. 시민적인 문학작품 들에서도 남자 친구는 대부분 기사적인 귀족이다. 따라서 여자들은 오늘날까지도 동화 속의 왕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방랑기사의 행적은 전래동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웨일스 출신의 켈트족 아서 Arthur 왕에 관한 것이다. 그의 원탁 모임은 전설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지역의 최고 기사들, 이를테면 랜슬롯, 트리스탄, 가웨인, 에레크, 갤러해드, 퍼시빌 그리고 마법사 멀린을 소집해 자신의 원탁에 앉혔다. 기사대회에서 다른 동료들보다 자신의 우수함을 과시하려면, 그들은 아주 특별한 잔, 즉 ‘성배(聖杯)'를 먼저 차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는 대신 트리스탄 Tristan은 이졸데 Isolde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삼촌과 약혼한 사이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기사들의 덕목은 더 이상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랜슬롯은 아서의 부인 귀네비어와 불륜을 맺었고, 그 결과 성배를 차지하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불신을 낳았고, 이런 경우 늘 그렇듯이 원탁의 기사들의 우정은 깨어졌으며, 서로 칼부림을 하여 서로의 칼에 몸이 산산조각 나 모 두 죽었다. 문학가들은 그것이 기사도의 덕목이 쇠락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기사도의 덕목은 봉건주의의 가신(家臣)들을 상대할 만 큼 성장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역사 연구에서 알 수 있다.
이 아서 왕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독문학(볼프람 폰 에셴바흐), 프랑스 문학(크레티앵 드 트루와 Chrétien de Troyes), 영문학(토머스 맬러리 Thomas그리고 음악학(바그너 Wagner)에서 연구되고 있다.
도시
근대문화의 요람은 역시 도시다. 중세도시는 아직 귀족들이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유도시였다. 즉 도시는 자치권이 있었으며, 이를 위해 스스로 법률을 만들었다. 이 법률은 뤼벡, 마그데부르크 또는 뉘른베르크의 경우가 모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도시들은 그것을 거의 그대로 넘겨받았다. 이리하여 민주주의와 소규모의 현대국가 가 실험되었다. 도시 귀족(시의원 피선거권을 소유)과 수공업자 조합이 서로 대치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그들은 과거 로마의 귀족과 호민관들처럼 도시의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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