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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릴의 안내

(북클럽/교양) 모두의교양 /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by 거제매생이 202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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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이제부터 로마 역사의 진행은 가속도가 붙고 고비를 맞게 되었다.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지도하에 노예들이 봉기하는데(커크 더글러스 Kirk가 영화로 제작), 이 봉기는 폼페이우스 Pompeius와 크라수스 Crassus에 의해 진압되었다(기원전 73~71). 그후 폼페이우스는 국민의 사회적 여망 들을 충족시켰고 막강한 전권을 위임받아 직할 식민지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른 한편 원로원은 카틸리나 Catilina의 반역 음모를 저지해 키 케로에게 멋진 승리의 연설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기원전 63).

여기에서 힘이 강화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해외 원정에서 귀국할 때 그의 베테랑 병사들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포상을 거부했다. 그 약속을 관 철시키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와 갈리아의 정복자인 카이사르 Caesar 3자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공동으로 원로원을 다스렸다. 이 공동 통치는 한동안 잘 진행되다가, 크라수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 하 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경쟁이 다시 불붙었고 이는 2차 내전으로 폭발했다. 이 내전은 갈리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 아스테릭스 Asterix(이 점은 불확실하다)와의 전투 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거느린 카이사 르의 승리로 끝났다. 카이사르는 독재자가 되었다. 이로써 로마 공화국이 끝나고 새로운 정치체제인 카이사르의 제정시대가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우리는 그 뒷이야기를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y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카시우스 롱기누스 Cassius와 브루투스Brutus가 반역을 일으켜 카이사르를 살해했다(기원전 44 3 15). 카이사르의 정당 친 구이자 동료 집정관인 안토니우스 Antonius는 그 두 사람을 일단 보호했지만 오늘날까지 극( 문학사의 명연설로 평가받는 연설(셰익스피어 작품의 연설 대목-옮긴이)을 통해서 국민을 선동해 그들을 축출하고자 했고, 카이 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와 레피두스 Lepidus와 반(反) 원로원反) 라인을 결성하여 제2 3(三頭) 정치체제를 열었다. 이들은 합심하여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필리피 근처에서 카이사르의 정신으로 제압했다"필 리피에서 다시 만나자.” 재기를 다짐할 때 쓰는 속담-옮긴이).

그 다음의 상황들은 셰익스피어의 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ius」에 잘 나타나 있다. 안토니우스는 동쪽으로 가서 용병을 모집했다.이때 그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빈둥빈둥 놀고먹는 연애 삼매 경에 빠졌다. 안토니우스는 경쟁자 옥타비아누스와 경쟁의식이 싹트는 것을 느꼈지만 그 갈등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동생 옥타비아 Octavia와의 정 략결혼으로 해소했다. 하지만 이것이 비극적 종말의 시작이었다. 안토니우 스는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클레오파트라가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발생한 군사적 충돌에서 그 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퍼뜨린)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소문을 접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기원전 30).

 

아우구스투스 

이로써 고비는 지나갔다. 이제 옥타비아누스가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에 대한 반역 사건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그는 공화 국의 겉모습을 유지함으로써 공화주의자들의 감정을 보살펴주었다. 원로 원은 존속했지만 그에게 여러 직책들과 함께 군 통수권을 평생 동안 위임했으며 특별한 신분의 표시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숭고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부터 제국에 평화를 선사했으며 국경을 견고히 했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문화가 꽃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기원전 3 1~14). 그의 재위 기간에 그리스도가 탄생했다. 거의 반세기 동안 집권한 그는 제국의 제도들을 거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여서 양아들 티베리우스 Tiberius가 권력을 고스란히 이양받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후로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의 성() 카이사르는 왕들에 대한 칭호가 되었다. 예를 들면 독일어의 카이저Kaiset, 러시아어의 차르Zar가 거기에서 유래했다. 그 이후 모든 제왕들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제정시대 : 네로와 그 밖의 황제들 

로마 제국은 제국의 제도와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로마 제국은 약 500 년간(기원전 31~서기 475) 계속되었다. 황제들 중에는 별의별 인물이 다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바로 다음 황제부터 일찌감치 기괴한 짓을 해서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남는 황제들이 있었다. ‘작은 장화(라는 별명의 칼리굴라 Caligula는 자신의 말을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할 정도로 미친 황제였다.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에게서 특기할 만한 것은 우둔함뿐이었다. 그는 한없이 방종한 부인 메살리나를 처형하고 나서 훨씬 더 고약한 아그리피나 Agrippina,즉 네로의 모친과 결혼했으나 이 여자는 그를 독살했 다. 그가 황제로서 남긴 업적은 아주 보잘 것 없었다. 그는 알파벳에 세 글자를 새로 첨가했으나, 그가 죽은 다음에 이내 사라졌다.

네로는 철학자 세네카 Seneca로부터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폭군 이 아니었으나 자신이 모친을 살해한 다음부터는 성격이 비뚤어지기 시작했다.매력적인 포파 이아 사비나와 결혼하고 싶어 진 네로는 부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는 광기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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