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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릴의 안내

(북클럽/교양) 모두의교양 / 유대인

by 거제매생이 2020.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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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자를 받아도 된다. 하지만 돈은 번식을 할 수 없다. 유대인들의 돈이 이자로 인해 많아지면, 그들은 돈과 성교를 하는 마법사들이나 다름없다. 아들 의 아들인 손자 대신에 복리이자가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기독교적 직업이 금지되어 있어 다른 방법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돈은 불어 나므로 유대인들은 폭리꾼이며, 아이들을 때려죽이며, 성체를 더럽히며, 우물을 오염시키며, 신을 죽였으며, 사탄의 명령에 따라 페스트를 퍼뜨리 는 사람으로 비친다. 그렇다.그들은 거의 사탄이다. 그들은 염소수염을 달고 있으며 악취가 나며 힘이 세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신을 경외하는 일이다. | 이런 논리로 대중을 부추긴 자는 선동 능력이 뛰어난 탁발승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의 문제를 폭리꾼에 대한 고소와 연결시켰고, 현재를 위해 빛과 어둠이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아직 히틀러라는 이름 대신에 베른하르트 또는 요한네스로 불렸지만, 히틀러와 너무나도 닮 앗다. 개인적으로는 금욕적이었으며, 자신의 빈곤한 청중들의 불안, 강박 관념 그리고 사회 문제들에 대해 감정 이입하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언변이 좋았고, 악마론적 환상에 사로잡혀 세계의 종말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설교는 항상 유대인 대학살을 야기했다. 그들 중 명망이 가 장 높은 자들은 교회를 거룩하다고 일컬었다. 예컨대 교황 피우스 Pius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를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 가 성 베른하르트와 성 요한네스와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페스트는 종국에 가서는 중세의 종말을 재촉하는 대화재가 되었다. 왜 그런가? 대학살과 역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땅값을 떨어뜨렸고 노동력을 감소시켜 임금의 상승을 낳았다. 지주들은 땅을 경작하기 위해 일꾼들을 돈으로 유혹해야 했다. 토지 지배의 옛 헌법은 해체되었고 모든 것은 와해되어 화폐경제를 촉진시켰다. 화폐경제는 봉토에 바탕한 주종관계를 임금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군대는 더 이상 봉신(封臣)과 종(從) 봉신들로從)봉신 구성되지 않았으며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봉신들에게 특권을 단계별로 분양하는 것을 통해서 통치가 이루어지는 대신에 봉급 관료들의 행정으 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벌써 현대적인 국가의 탄생을 위한 전제가 마련되었다.세기의 어느 무렵에 중세는 숨이 끊어졌으며 1500년이 되었을 때 근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 어섰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재탄생을 의미한다. 1550년에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삶을 묘 사하면서 그 시대에 대한 명칭으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사리 Vasari였다. 고대의 이교도 문화가 중세의 긴 잠이 끝난 후 재발견되었다는 뜻으로 그는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 르네상스는 무엇보다도 건축 미술, 조각 그리고 회화 분야에서 두드러졌고, 오늘날의 우리도 경탄을 금 치 못하는 훌륭한 이탈리아 도시들을 창조했다. | 이렇게 시각예술 계열이 우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르네상스에서 재탄생된 것은 현세의 향락, 관능, 색채, 밝은 빛 그리고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내세로 갔던 인간이 현세로 되돌아왔으며 지상에서 낙원을 발견했다. 이것은 형태와 색의 낙원이었다. 그 발견은 어지럼 증을 일으켰다. 르네상스는 축제, 과다, 과잉으로 체험되었다. 감각을 자극하는 예술인 건축과 회화가 유난히 발달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기간은 정확히 언제인가? 우리는 그 기간을 대략 1400년부터 1530년까지의 130년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재탄생의 축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 돌연 발생한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봉건주의가 화폐경제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봉건 왕국 대신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의 집합체 가 되었다. 어디에서 돈이 생겼는가

오리엔트로 가는 무역로는 이탈리아를 통해 나 있었다. 여기에 모인 자본은 예술산업과 직물공업 분야로도 흘러들어 가 강력한 시민계급을 형성시켰다

기독교 유럽의 교회 헌금들이 끝없는 홍수처럼 로마로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교황들은 1450년부터 도시들을 새로 확장하기 시작했고 과거보다 더 많은 예술가들을 고용했다. 마침내 그들은 베드로 성당을 짓 기 위해 전 유럽 기독교인들의 마지막 남은 돈까지 헌금으로 짜내려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이 발생했다 (1517). 

화폐경제의 이런 폭발적 성장은 이탈리아를 금융업의 요람으로 만들었다(은행업과 관련된 현대의 모든 용어는 이탈리아어다. Konto계좌, 계좌 Girokonto 당좌계좌 당좌계좌, bankrott파산, Disagio정화正貨할증금, Kredit여신, Skonto 공제 따위). 그리고 금융업의 중심은 피렌체였다. 가장 큰 은행 가문은 역시 피렌체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였다. 피렌체는 그리스의 아테네처럼 되었고 르네상스의 요람이 되었다. 여기에서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자들인 단테,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가 태 어났는데, 이들은 그 후의 이탈리아의 문학 언어를 주도함으로써 피렌체어를 현대의 이탈리아어가 되게 했다(→ 문학). ● 단테 Dante는 다시금 중세의 세계상을 종합했다. 그는 『신곡 La 지옥, 연옥 그리고 낙원을 묘사함으로써 모든 형벌과 상급이 제자리를 찾는 도덕적 우주 질서를 최후로 창조했다

페트라르카 Petrarca는 라우라 생전의 시들 Rime로 현대적인 연애 서정시를 창조했다

보카치오 Boccaccio는 『데카메론 Decamerone으로 근대소설의 전형을 창조했고 르네상스의 개방된 성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 피렌체에서는 1439년에도 로마의 동방교회와 그리스의 동방교회를 통일하기 위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이때 그리스 학자들이 대거 피렌체로 왔다. 1453년에 터키인들이 비잔티움을 점령하고 동방 제국을 소멸시켰 을 때도 수많은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로 왔다. 이것은 피렌체에서 인문 주의가 유난히 지속적으로 꽃필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및 라틴텍스트들의 연구를 경쟁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었 다. 결과적으로 이들 모두가 고대문학의 언어형식을 새로운 문체의 이상 (理想)으로 격상시켰다. 이런 식으로 재발굴된 것은 다음과 같다.

세네카 Seneca의 비극. ● 플라우투스 Plautus와 테렌티우스 Terentius의 희극. ●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서 시작해서 리비우스 Livius와 살루스티우스 Sallustius에 이르는 그리스 및 로마 역사학자.

호라티우스 Horatius, 카툴루스Catullus 그리고 오비디우스 Ovidius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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